책멍듣멍 4주차 독서 감상 후기 - "300년 전쟁사에서 찾은 승리의 도구, 승자의 DNA" 을 읽고

트위터 개발자 분들의 독서 모임 "책멍듣멍" 에 참여하여 4주차 독서 후기를 적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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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전쟁사에서 찾은 승리의 도구 "승자의 DNA"

인간관계에 서투른, 자만심 넘치는, 융통성 없는, 조현병에 찌든, 심통 사나운, 품위 없는, 자기 연민에 빠진, 불안에 떠는, 감정적인, 쉽게 실망하는, 짜증 내는, 억울해하는, 성을 잘 내는, 말수가 적은, 정치감각이 현저히 부족한, 천박한

열거된 위의 단어는 이 사람을 묘사하는 수식어 입니다. 이토록 수많은 결점을 안고 있는데 어떻게 만인의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며 한장씩 넘겨 보았습니다.

전 세계 해군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꼽히는 사람

반대로 47세의 짧은 그의 생애 동안 사람들의 가슴에는 아래와 같은 불꽃을 남겼습니다.

두려움 없는 용맹함, 수그러들 줄 모르는 공격성, 강한 사명감과 신앙심, 적군을 향한 맹렬한 증오와 분노, 해군 전략가 로서의 천재성, 끝없는 자신감과 어마어마한 자만심, 그리고 강렬한 야망의 소유자

책에 여러 지도자들이 나오는데, 저는 이 사람의 파트를 읽고 어릴 적 좋아했던 세계사가 떠오르면서 흥미롭게 읽어 보았습니다.

일단 자세한 역사적인 사항은 아래 적어보기로 하고 일단 느낀 점에 포커스를 맞춰 보겠습니다.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

목사 가문의 다섯째로 어린 나이에 해군에 지원했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의병 제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해군 시험에 재도전하여 통과 후 해군 장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요.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사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시민들의, 시민에 의한 나라, 정치를 도모하고자 했다면 영국은 왕은 신이 부여한 권능이며 이에 대한 도전은 곧 신에 대한 모독, 반역을 의미했습니다. 넬슨은 절대 왕정에 반하는 것은 모두 다 적이라 간주했습니다.

숱한 전쟁으로 한쪽 눈을 잃고 오른쪽 팔을 잃어버리게 되는 넬슨. 보통 범인 이라면 현역에서 은퇴를 하거나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법도 한데 만약 그랬다면 오늘날 들고 읽는 책에 호레이쇼 넬슨 제독, 트라팔가 해전 등의 이야기는 아마 없었겠지요.

무엇이 어떻게 그를 전투에서 큰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했을까요?

흔히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과 바로 저 넬슨 장군을 비교하고는 합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다 라는 말도 떠오르는데, 넬슨 이나 이순신 장군도 전쟁을 치룰 때 죽음이라는 것으로부터 결코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더 용맹하게 싸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느낀 점

넬슨 제독은 여러 해전을 통해 국민 영웅이 되었지만, 당시 왕 (조지 3세) 으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고 (아마 왕보다 더 인기가 많아서 시기해서 였을까) 같은 해군 장교들이 그를 천박한 해적이라 불렀다 합니다.

그는 비방과 소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런 세력을 설득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지지 세력을 더 공고히 하는데 힘써서 전쟁 시 더 단결된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합니다.

터무니 없이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자부심, 자만심과 더불어 위에 언급했던 수많은 단점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걸 압도하는 몇 가지의 장점이 그를 셰계 해전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고 당시 영국 해군을 세계 최강의 해군으로 만들 수 있지 않았을 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아래는 번외로 제가 좋아하는 역사 몇 토막을 적어 보았습니다. 아래는 제가 그냥 적은 것이니 안 보셔도 됩니당 ㅎㅎ

세계 3대 해전

  1.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의 배경인 살라미스(Salamis) 해전
  2.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칼레 해전 :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
  3. 영국의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곶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무찌른 트라팔가 해전 : 영국과 프랑스의 해상 패권 경쟁에 종지부를 찍어버림

이중 2, 3이 영국의 이야기 입니다. 당시 영국은 그럼 어떻게 최강의 해군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유럽의 무역 교역로 중심이 변함 (지중해 ➡ 대서양으로)

중세까지의 유럽 교역로는 지중해 중심이였습니다. 이 때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 메디치 가문들이 동양과의 무역을 직접 주도하거나 중개 무역을 하면서 이익을 많이 거두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유럽 교역로의 중심이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되어 남, 북 아메리카에 진출하고 침략을 통해 식민지화를 하게 됩니다.

지중해 무역을 하던 당시의 영국은 크게 빛을 볼 수 없던 나라였는데 바로 이 무역의 중심이 바뀌면서 섬나라의 이점, 지리적으로 대서양에 진출하기 좋은 접근성을 가지게 되는데요.

그런데 이러한 패턴을 네덜란드가 먼저 읽고 1602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최초의 주식거래소를 설립하여 대항에 선박에 투자를 유치하는 등 대서양 선점에 앞장서 나가게 됩니다.

꿀빨던 네덜란드의 중개 무역은 항해 조례로 어라리?

네덜란드가 배에 관한 항해술은 뛰어난 반면, 국력이나 군사력은 약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영국, 프랑스, 식민지 사이의) 간의 무역에서 네덜란드의 항해술, 배를 이용한 "중개 무역" 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깁니다.

이후 영국이 항해술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서 인제 네덜란드 니네 배 안써 영국과 관여된 무역이 발생하는 것에는 영국의 배, 항해술을 쓴다 라고 선포해 버립니다. (영국 크롬웰의 항해 조례 발표, 1651)

(하지만 크롬웰은 왕되고 싶어했다가 죽고 난 뒤 부관참시.. ㄷ ㄷ)

그래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이 일어나고 (영란전쟁) 영국이 이기긴 이겼는데, 엎치락 뒤치락 이겨서 인지 이때 영국은 해군의 중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트라팔가 해전 직전의 영국과 프랑스의 상황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 해전이 있기 전까지의 영국과 프랑스의 상황은 아래와 같습니다.

영국 : 1793-1805 까지 영국 군함이 500척에서 950척으로 늘어남 (show me the 군함)

프랑스 :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 처형, 공화정. 프랑스 해군 기술자, 장교가 영국으로 탈출, 대혁명으로 조선기술자, 배 운용 인력의 손실이 발생, 1799년 나폴레옹 쿠데타, 1804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유럽 정복 전쟁 참여

좀 더 요약하자면 영국은 해군력이 강했지만 더욱 강해져 세계 최강 해군이 되었고, 프랑스도 해군 양성 사업을 진행했으나 대혁명으로 차질이 생기고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정복 전쟁을 통해 프랑스 육군은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시대였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해군으로는 도저히 영국에 어떻게 안되니 수송선에 육군을 잔뜩 실어 영국으로 폭탄 드랍을 날리려는 계획을 품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계획

영국과 프랑스는 도버 해협을 끼고 있는데 34km, 당시 배로 3-4시간이면 닿을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인근 해안가에 18만 병력과 수송선을 세팅해 놓고 프랑스 육군이 영국에 상륙만 하면 바로 점령 끝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도 그걸 잘 알아서 도버해협을 막강한 해군력으로 철통 봉쇄를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유인책으로 프랑스 남부 툴롱에 프랑스 주력 해군을 전부 모아 스페인 과 전열함을 연합해 바다를 위로 돌아 프랑스 북쪽 해안가로 오면 해협을 건너 폭탄 드랍을 날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데 이 지중해도 영국이 장악해서 툴롱에서 스페인 방향으로 출발하자마자 넬슨에게 들키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스페인 카디프의 6척 전열함과 합류하고 남쪽으로 함대가 빠지는 척을 합니다.

근데 프랑스로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이 진격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해안가 18만 상륙군 일부를 빼서 방어용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프랑스 나폴레옹의 몰빵 영국 드랍계획이 어긋나게 됩니다.

호레이쇼 넬슨을 무서워한 프랑스 해군제독 피에르 빌뇌브

나폴레옹은 당시 프랑스 해군 제독이자 툴롱에서 현재 스페인 카디프로 전함을 빼내온 피에르 빌뇌브 제독에게 명령합니다.

야아 피에르, 연합군 상대하느라 병력 일부가 빠졌어 너 거기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가가지구 프랑스 병력들 최대한 다 영끌해와.

아 tq 겨우 툴롱에서 봉쇄 뚫고 카디프 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면 넬슨을 마주쳐야 하는 피에르 빌뇌브는 나폴레옹보다 넬슨이 더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습니다. (이유는 나일 해전에서 제대로 깨져서 도망.. 했기 때문)

그래서 나폴레옹의 명령을 적당히 뭉개고 카디프에서 시간을 매우 끌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짤라버린다고 하자 겨우 쫄아서 다시 가는데 넬슨을 마주쳐 버리고 그렇게 트라팔가 곶에서 해전이 시작됩니다.

11자 함포사격의 일반적인 해상 전투 방식을 깨버린 호레이쇼 넬슨

당시 전열함 (Ship of the line) 은 배 양쪽 사이드 측면에 대포 구멍을 통해 상대 배에 공격을 가합니다. 따라서 배의 선미나 후미는 약할 수 밖에 없고 공격을 하려면 배의 사이드를 통해 공격을 해야 하기에 자연스레 아군의 배나, 적군의 배나 서로 공격을 하려면 배가 11자로 정렬해서 함포 사격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반대로 아군의 배와 적국의 배가 90도로 마주치면 당사자는 배의 취약한 부분 (선미, 후미) 을 대놓고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니 승패는 이미 갈린 거나 다름 없게 됩니다.

넬슨 제독은 배를 11자 종대로 하는 종사 공격 을 통해 미리 포진해 있던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선에 다가갑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배의 취약한 부분을 보여주고 정면으로 나아가니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지만 일단 적국의 연합 함선에 스며 들어 버리는 순간, 반대로 영국 군함 측에서 맘놓고 종사 공격이 가능했습니다.

영국 27척 vs 프랑스, 스페인 연합 33척 의 트라팔가 해전은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났습니다.

  • 프랑스, 스페인 연합군 사망자 5000명, 포로 8000명, 군함 21척 나포, 1척 격침
  • 영국 400명 인명피해, 넬슨 제독 피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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